잊혀 가는 말레이시아 ‘위안부’ 문제
지난 8월 31일은 67번째 말레이시아 독립기념일(Hari Merdeka)이었다. 이어서 어제는 말레이시아 날(Hari Malaaysia)였다. 말레이시아 독립기념일은 1957년 8월 31일에 뚠구 압둘 라흐만(TunkU Abdul Rahman Putra Al-Haj) 초대 수상이 독립을 선언하며 ‘독립(Merdeka)'을 7번 외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사실 말레이시아는 영국 이전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짧지만 일본 식민지였던 역사가 있다. 자전거부대를 앞세워 말레이시아를 침략한 3만에 달하는 일본군은 1941년 12월 8일에 트렝가누 시작으로 19일에는 페낭, 23일에는 타이핑을 점령했다. 파죽지세로 말레이시아 북부를 장악한 일본은 남하하여 1942년 1월 11일에 쿠알라룸푸르 점령하고 2월 15일에는 싱가포르를 점령한다.
이렇게 중 말레이시아를 점령한 일본은 3년이 조금 넘는 동안 수많은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한 범죄 중 ‘위안부’라는 문제는 한국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며, 전쟁 이후 말레이시아에서 살아 남은 ‘위안부’는 아직까지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종전 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말레이시아는 대표단을 파견할 수 없었으며, 그 자리에는 영국 관료들이 참석했다. 전쟁 배상에 관한 결정권자인 미국은 일본을 구하기 위해 배상금 지불을 거절했고, 말레이시아는 보상으로 전함(Warship) 한 척만을 받을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배상받기를 거절했지만 일본은 1960년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각각 2500만 링깃을 배상금으로 지불했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들은 어떠한 보상금도 받지 못했으며 이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상태이다.(6)
태평양 전쟁 중 말레이시아를 장악한 일본은 다른 점령지와 마찬가지로 말레이시아 곳곳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3년 8개월에 달하는 기간 동안 말레이시아에 얼마나 많은 위안소가 설치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그러나 《The New York Times》에 따르면 쿠알라룸푸르 내에만 20여개에 달하는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쿠알라룸푸르 이외에 말라야(말레이 반도)에만 20개가 넘는 일본군 주둔지가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 40~50개 이상 되는 위안소가 현재 서말레이시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위안부’를 연구하는 나카하라 미치코(Michiko Nakahara) 와세다 대학교 교수는 쿠알라룸푸르, 페낭, 쿠알라 필라, 느그리 슴빌란, 포트딕슨, 믈라까, 세팡 등 말레이시아 전역에 위안소가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취업 사기, 협박, 납치 등 방식으로 ‘위안부’를 모집했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위안부’를 모집했다. 마이클 총(Michael Chong) 말레이시아화인연합당(Malaysian Chinese Association, MCA) 의원은 ‘위안부’ 피해자와 나눈 인터뷰를 《Free Malaysia Today》를 통해 공개했다. 기사를 보면 1943년 당시 세팡에 거주하던 위안부 피해자는 집에로 들이닥친 일본군 4명에게 납치됐으며, 당시 16세이던 피해자는 위안소로 끌려갔다. 피해자는 매일 12명이 넘는 일본군을 2년간 성적으로 상대해야만 했다. 두 아이 엄마이던 25세 페낭 여성 로잘린드 소우(Rosalind Saw) 역시 일본군에 납치되어 당시 페낭에 있던 통록 호텔(Tong Lock Hotel)로 끌려갔다.
로잘린드 소우는 1994년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대중에 공개했다. 그녀는 “바쁜 날에는 하루 30명을 상대해야 했으며 옷을 입거나 씻을 시간도 없었다. 일본군은 항상 취한 상태였고, 내게 수시로 폭력을 가했다. 우리가 겪은 굴육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피해자는 1945년 여아를 출산하면서 위안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잊을 수도 또 잊혀지지도 않는 악몽을 선사한 페낭 위안소 건물은 현재에도 같은 자리에 남아 있다. 해당 건물은 이후에 유흥주점 등으로 활용됐으며 수많은 피해자가 고통을 받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은 해당 장소를 잘 모르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나 페낭주정부 역시 해당 건물을 보존하거나 관련된 내용을 알리려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91년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씨가 최초로 TV를 통해 공개적인 증언에 나섰고, 1992년에는 호주 여성은 얀 루프 오헤른(Jan Ruff—O’Herne) 씨가 서양 여성 중에서는 최초로 피해자임을 세상에 공개했다. 얀 루프 오헤른 씨는 1994년에 ‘침묵의 50년(Fifty Years of Silence)’을 발간했으며, 2007년에는 미국 하원 인권 보호 청문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위안부’ 피해자 증언은 한국을 비롯해 이웃한 피해국 생존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소극적 태도를 보여왔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말레이시아 정부가 받은 2500만 링깃을 포함하여 일본이 제공한 경제적 지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1993년 나집 라작(Najib Razak) 당시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대표는 무스타파 야쿠브(Mustapha Yaakub) 통일말레이국민조직 청년단 의원이 유엔세계인권대회에서 하려고 한 ‘위안부’ 증언을 저지했다. 이에 현지 언론《MalayMail》은 “(일본)투자 유치를 위해 우리 영혼을 담보로 잡고 정의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라며 나집 라작의 행보를 강하게 비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에서는 한국 ‘위안부’ 피해자만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위안부’ 피해자도 있지만 말레이시아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적다. 주말레이시아 일본대사관 홈페이지를 보면 한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말레이시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않지 않고 있다.
말레이시아 언론 역시 이러한 무관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말레이시아 ‘위안부’ 문제를 마지막으로 조명한 기사는 2021년 6월 17일에 《CILISOS 》가 “After WW2, Japan compensated for occupying Malaya. But Malayans received almost nothing”으로 무려 3년 전 기사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동방정책을 비롯하여 각종 경제 분야에서 ‘위안부’ 문제가 말레이시아-일본 간 우호 관계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언론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말레이시아 양국은 민간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함께 조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에 남아있는 일본군 위안소를 복원하고 양국 공동 연구로 이러한 전쟁 범죄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해당 문제가 잊혀지지 않도록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The New York Times》(1993. 4. 14). A ‘Comfort Women’ Screen Hides the Enduring Shame, https://www.nytimes.com/1993/04/14/opinion/IHT-a-comfort-women-screen-hides-the-enduring-shame.html
- 《Malaysiakini》(2001. 8. 11). Umno Youths bid to highlight plight of Msian ‘comfort women’ foiled, https://www.malaysiakini.com/news/4265
- 《Malaysiakini》(2001. 8. 11). Researcher details shattered lives of local comfort women, https://www.malaysiakini.com/news/4269
- 《Malaysiakini》(2001. 8. 14). Time to comfort our forgotten ‘comfort’ women, https://www.malaysiakini.com/letters/9082
- 《The Sydney Morning Herald》(2019. 8. 20). Australian WWII rape survivor and human rights activist dies at 96, https://www.nytimes.com/1993/04/14/opinion/IHT-a-comfort-women-screen-hides-the-enduring-shame.html
- 《The Sun Daily》(2015. 12. 30). MCA seeks “good will payment” from Japanese government, https://thesun.my/archive/1651565-FSARCH344142
- 《The Sun Daily》(2017. 1. 11). ‘Comfort Women’ Issue: Historical Scars Don’t Go Away – Analysis, https://www.eurasiareview.com/11012017-comfort-women-issue-historical-scars-dont-go-away-analysis/
- 《Free Malaysia Today》 (2021. 3. 8). Untold stories of Malaya’s ‘comfort women’, https://www.freemalaysiatoday.com/category/nation/2021/03/08/untold-stories-of-malayas-comfort-women/
- 《CILISOS》 (2021. 6. 17). After WW2, Japan compensated for occupying Malaya. But Malayans received almost nothing, https://cilisos.my/after-ww2-japan-compensated-for-occupying-malaya-but-malayans-received-almost-no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