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9. 2. 07:07ㆍ필리핀/행사

매년 8월이 되면 필리핀 대도시부터 작은 섬마을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거대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앙헬레스와 인근 클락 역시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특별한 달을 맞이한다. 8월은 바로 필리핀 국어인 ‘필리피노(Filipino)’어와 전국 각지에 잔존하는 수많은 토착 언어들을 기념하는 국가적 대축제, ‘부완 응 위카(Buwan ng Wika)’가 시작되는 때이다. ‘부완 응 위카’는 우리말로 ‘언어의 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이 되면 단순히 언어학적인 학술 행사를 치르는 수준을 넘어서 다양한 문화 활동이 전개된다. 필리핀 사람들은 이 시기를 통해 오랜 식민 지배 역사 속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자국 언어와 문화를 기념한다.
필리핀에 단일한 언어를 도입하려는 노력은 독립 전인 1935년 마누엘 L. 케손(Manuel L. Quezon) 대통령 재임 시절에 처음 시도됐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1946년, 마침내 필리핀에서 가장 널리 쓰이던 타갈로그어(Tagalog)를 기반으로 한 언어가 국어로 채택됐다. 같은 해 제4대 대통령 세르히오 오스메냐(Sergio Osmeña)는 외세 통치로 피폐해진 언어적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타갈로그어 문학의 거장 프란시스코 발라그타스의 생일에 맞춰 일주일간의 ‘언어 주간(Linggo ng Wika)’을 제정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타갈로그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혼란과 반발이 적지 않았다. 이 새로운 국어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러한 명칭에 대한 혼란을 정리하고자 필리핀 정부는 1959년 공식 명칭을 ‘필리핀어(Pilipino)’로 지정했다가, 1973년에 이르러서 지금과 같은 ‘필리핀어(Filipino)’로 변경했다. 행사 개최 시기와 기간 역시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초기 4월에 열리던 행사는 1955년 라몬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 대통령이 ‘국어의 아버지’ 케손 전 대통령의 생일이 포함된 8월 13일~19일로 옮기면서 한층 활기를 띠었다. 이어 1997년 피델 V. 라모스(Fidel V. Ramos)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1041호를 통해 일주일이라는 기간만으로는 다민족·다언어 국가 전역에 모국어의 가치를 전파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8월 한 달 전체를 ‘언어의 달’로 격상시켰다. 이로써 ‘부완 응 위카’는 필리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장기 문화 축제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간이 흘러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 ‘부완 응 위카’는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이 진화하고 있다. 과거 행사가 마닐라를 중심으로 ‘타갈로그어 기반인 필리피노어’를 표준어로 보급하고 정착시키는 중앙집권적 통합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다양성과 포용’을 화두로 다원주의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필리핀은 수천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세부아노어, 일로카노어, 일롱고어, 와라이어 등 공식 집계된 것만 180여 개가 넘는 언어가 공존하는 초다언어 사회다. 과거에는 이러한 다원성이 국가 통합의 걸림돌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현재는 소중한 문화 자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의 ‘부완 응 위카’는 소멸 위기에 처한 소수 민족의 언어들을 주류 무대로 끌어올리고 보존하는 상생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중앙집권적 표준어 보급을 넘어 각 지역 언어를 존중하는 것은 서로 다른 언어적 배경을 지닌 필리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끈이 된다. 나아가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 토착어를 지켜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수하는 일 또한 이 축제와 필리핀 정부가 짊어져야 할 중요한 시대적 과제다.
필리핀 교육부는 매년 시대적 흐름과 국가적 과제를 반영한 새로운 주제를 발표하며 축제를 시작한다. 이러한 다원적 가치관 위에서 선정된 2026년 ‘부완 응 위카’의 공식 주제는 급격한 디지털 기술 환경을 반영한 ‘필리핀어와 인공지능: 연구 수단이자 정보로 향하는 다리(Wikang Filipino at AI: Kasangkapan sa Pananaliksik at Tulay sa Yaman ng Impormasyon)’이다. 이번 주제는 자국어가 인공지능(AI) 기술 환경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고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인공지능 기술을 도구 삼아 표준어인 필리핀어의 디지털 자산을 체계적으로 구축함은 물론, 각 지역의 소외된 토착 언어들까지 AI 연구 영역으로 포용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담고 있다. 이러한 모국어 수호와 보존의 열기는 필리핀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온라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26년 축제 기간을 맞아 주아랍에미리트 필리핀 대사관이 재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타갈로그어 스토리 창작 공모전을 개최하는 등, 전 세계 재외공관에서도 해외 거주 필리핀인들의 언어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부완 응 위카’는 한국인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정신적 궤적은 매년 10월 9일 우리가 마주하는 ‘한글날’과 그 의미를 공유한다. 두 나라 모두 식민 지배에 맞서 언어와 정체성을 지키려 투쟁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나라의 기념 방식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한국은 세종대왕의 독창적인 문자 창제를 기리며 10월 9일 하루 동안 기념식을 진행하지만, 필리핀은 ‘국어의 아버지’ 마누엘 케손 대통령의 탄생월인 8월 한 달 동안 다언어 환경 속에서 통합과 보존을 도모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언어를 매개로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열망은 두 나라가 완벽하게 닮아 있다. 결국 ‘한글날’과 ‘부완 응 위카’는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빼앗겼던 주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운 숭고한 역사적 자부심의 표상이다. 언어를 지키는 것은 결국 그 언어 속에 담긴 민족의 역사와 미래의 꿈을 지키는 일이다. 8월 한 달 동안 필리핀 전역을 뜨겁게 달구는 이 언어의 향연은, 우리에게도 곧 다가올 한글날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맞이해야 하는지, 그리고 일상의 말과 글 속에 담긴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적 자부심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소중한 문화적 거울인 셈이다.
침고자료
- 《FilipinoPod101》 (2020. 7. 27). Buwan ng Wika: Celebrating Filipino Language Month, https://www.filipinopod101.com/blog/2020/07/27/buwan-ng-wika-celebrating-filipino-language-month/
- 《The Philippine Star》 (2024. 8. 25). Facts, history explained: August is Buwan ng Wika in the Philippines, https://www.philstar.com/lifestyle/arts-and-culture/2024/08/25/2377351/facts-history-explained-august-buwan-ng-wika-philippines
- 《&ASIAN》 (2025. 7. 29). The 25 Best P-Pop Songs of the 21st Century: So Far, https://andasian.com/the-25-best-p-pop-songs-of-the-21st-century-so-far/
- 《Philippine Information Agency》 (2026. 8. 3). KWF, binigyang-diin ang etikal na paggamit ng AI sa paglulunsad ng Buwan ng Wika, https://pia.gov.ph/news/kwf-binigyang-diin-ang-etikal-na-paggamit-ng-ai-sa-paglulunsad-ng-buwan-ng-wika/
- 《Balita》 (2026. 8. 8). Public school na pinutakti dahil sa AI poster contest, nagsalita na!, https://balita.mb.com.ph/2026/08/08/public-school-na-pinutakti-dahil-sa-ai-poster-contest-nagsalita-na/
- 《Rappler》 (2026. 8. 16). Musika at wikang Filipino: Mga piling awit para sa Buwan ng Wika, https://www.rappler.com/people/artists/musika-wikang-filipino-awit-buwan-ng-w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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