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30. 05:06ㆍ말레이시아/음식과 문화

말레이시아 주택가(Taman)에는 거의 한 세기 동안 변함없이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다. 바로 ‘로티 바이(Roti Bai)’ 또는 ‘로티 바부(Roti Babu)’라고도 불리는 ‘로띠맨(Roti Man)’ 경적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로띠맨은 과거 금속 보관함을 실은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비던 보부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100cc~125cc 소형 이륜차에 신선한 식빵과 번(Bun), 각종 간식거리를 싣고 주민들을 찾아간다. 로띠맨들은 수동식 고무 경적(Bulb Horn)을 울리거나 금속통을 막대기로 두드려 도착했음을 알리는데, 이 소리는 주민들에게 단순한 영업 신호를 넘어 하루 일과를 알리는 정겨운 이정표가 된다. 특히 이들은 일반 식료품점과 달리 고객 집 앞에서 즉석에서 식빵을 잘라 카야(Kaya) 잼이나 마가린을 발라주는 등 세심한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3주 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말레이시아 로띠맨(The Roti Men of Malaysia)》을 통해 소개된 주인공, 인도 타밀나두 출신 20살 청년 하자(Haja)는 현재 로띠맨들이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극심한 취업난을 피해 가족을 부양하고자 2022년 말레이시아로 건너온 그는, 2025년 사촌 형으로부터 이 사업을 물려받았다. 매일 아침 왓츠앱(WhatsApp)으로 주문한 빵을 싣고 길을 나서는 이륜차에는 무려 100kg이 넘는 무게가 실린다. 초반에는 중심을 잡지 못해 넘어져 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기도 하고, 하루 12~16시간 동안 오토바이 위에서 사투를 벌이며 최대 80km를 이동하느라 허리 통증을 달고 살지만, 그는 가족을 위해 매일 아침 경적을 울린다.

로띠맨들이 파는 가장 상징적인 제품은 ‘로띠 벵갈리(Roti Bengali)’이다. 이 빵 역사는 1928년 페낭에서 인도계 무슬림 셰이크 모드 이스마일(Sheikh Mohd Ismail)로부터 시작된다. 1932년 마드라스 출신 무슬림들이 ‘브리티시 말라야 베이커리(British Malaya Bakery)’를 설립했을 당시, 이들은 동업자를 타밀어로 주주를 뜻하는 ‘팡갈리(Panggali)’라 불렀다. 그런데 이를 들은 페낭 사람들이 ‘벵갈리’로 잘못 발음하면서 오늘날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1946년에는 말라야 베이커리(Malaya Bakery)로 상호를 변경하기도 했다. 일본 점령기 당시, 일본군이 ‘브리티시(British)’라는 단어를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1964년에는 ‘이스말리아 베이커리(Ismalia Bakery)’를 거쳐 2007년 현재와 같이 말리아 베이커리(Maliia Bakery)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로띠 벵갈리를 즐기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빵 사이에 각각 카야(Kaya) 잼과 마가린을 바른 ‘로띠 까윈(Roti Kahwin)’이다. ‘카윈(Kahwin)’은 말레이어로 ‘결혼’을 뜻하는데, 전혀 다른 두 재료가 만나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마치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결혼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카야 잼은 신부에, 짭짤하고 풍미가 진한 마가린(또는 버터)은 신랑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완벽한 ‘단짠’ 결합은 현지인들 사이에서 천생연분과 같은 맛으로 통한다. 이러한 혼합 문화는 음료에도 이어져 밀크티(Teh)와 커피(Kopi)를 섞은 것을 ‘꼬삐 까윈(Kopi Kahwin)’이라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인도계 무슬림들이 이어온 로띠맨은 단순한 상인을 넘어 지역 사회를 하나로 잇는 중요한 연결 고리였다. 또한 많은 말레이시아인에게 로티 맨은 어린 시절 동전을 들고 뛰어나가 간식이나 빵을 사 먹던 추억 어린 존재이다. 그러나 현대화 물결 속에 대형마트와 24시간 편의점이 늘어나고, 외부인 출입을 제한하는 주택단지(Gated Communities)가 증가하면서 로띠맨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주인공 하자가 활동하는 페탈링 자야(PJ)나 클랑(Klang) 지역 오래된 주택가와 ‘로띠 벵갈리’ 원조인 페낭에서는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비록 그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지만, 로띠맨은 오늘도 말레이시아 길 위에서 가장 따뜻하고 신선한 역사를 배달하고 있다.
참고자료
- https://youtu.be/ClAKolnA65o?si=wZR8XzAklybpPKyZ
- http://www.maliiabakery.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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