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소설 <에르미따>

2024. 10. 23. 10:44필리핀/음식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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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따 성당

공식적으로 필리핀 수도는 마닐라시(City of Manila)이지만 상당수 관공서가 마닐라시 이외에 인근 다른 도시에 분산되어 있다. 이렇게 분산되어 있는 일대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용어가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이다. 메트로 마닐라는 16개 시(City)와 1개 자치시(Municipality)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는 별개 행정구역이었으나 1975년 11월 7일에 대통령령을 통해 '메트로폴리탄 마닐라(Metropolitan Manila)'라는 광역 행정구역이 됐다. 이후 1978년 6월 2일에 대통령령으로 메트로폴리탄 마닐라를 필리핀 국가 수도 지역(National Capital Region, NCR)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리핀 통계청이 가장 최근에 수행한 인구주택총조사를 보면 2020년 5월 1일 기준 필리핀 인구는 1억 903만명이며, 이 가운데 1천 348만명이 메트로 마닐라에 거주하고 있다. 메트로 마닐라는 인구 1,000만이 넘는 필리핀에서 유일한 대도시(Metropolis)로 정부청사와 교육기관이 밀집한 필리핀 최대 도시 케손(Quezon), 공단과 금융 지역이 있는 파식(Pasig), 마닐라만을 따라 호텔과 공항 등이 있는 말라떼(Malate)와 파사이(Pasay) 등이 있다. 이러한 말라떼와 연결된 에르미따 역시 필리핀 근현대사를 볼 수 있는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에르미따 지역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필리핀 부유층과 외국인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흥가가 형성됐다. 에르미따는 잠시 유흥업소가 철거됐으나, 2000년대가 되면서 다시 유흥가가 넓게 형성된 곳이다. 해당 지역에는 유흥가만이 아니라 국민 영웅인 호세 리잘을 기리는 공원과 미국 대사관, 필리핀 국립미술관 및 자연사 박물관 등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리핀 소설 <에르미따(Ermita)>는 바로 이 일대에서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벌어진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작품을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Francisco Sionil Jose) 작가는 1942년생으로 필리핀 산토 토마스 대학교를 중퇴하고 기자 생활을 거친 뒤 작가로 활동 중이다. 

국내 번역된 필리핀 소설 <에르미따>

소설 주인공 에르미따는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 콘시타 로조가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한 후 태어났다. 그녀를 숨기고자 했던 어머니 콘시타는 주인공 에르미따를 보육원에 맡기고 미군 중위와 결혼한 뒤 필리핀을 떠난다. 이후 성장한 에르미따는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이모 펠리시타스가 있는 저택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강간으로 태어난 에르미따는 집안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하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가문에 복수를 결심한 에르미따는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권력가들에게 접근하여 어머니와 외가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녀는 어머니가 필리핀에 돌아오자 어머니 남편과 잠자리를 하고, 어머니가 일본군에게 강간당했다는 사실 또한 그 미국인 남편에게 폭로한다. 에르미따는 동성애자인 외삼촌 정체를 세상에 공개하고, 자신을 학대했던 이모에 대한 성적인 추문을 퍼뜨리면서 외가에 대한 복수를 철저히 단행한다. 작가는 주인공 에르미따를 통해 필리핀 고위층과 현대사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필리핀 사회에 만연한 부패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에르미따가 매춘을 통해 만나는 인물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이며 부패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소외된는 사회 계층과 권력이 가진 어두운 면을 조명하며, 독자들에게 사회 비판적인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작중에는 주인공 에르미따 동료였던 릴리아가 군부독재에 항거하다가 의문사당하는 장면도 있다. 릴리아가 죽기 전에 에르미따는 자신이 했어야 하는 일을 하는 아니타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이에 동참하지는 않는다. 어머니 남편인 미국인도 자신이 필리핀 사람이라면 혁명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고, 작중 역사 교수인 크루즈는 암울한 필리핀 현실에 좌절하면서 자살한다. 크루즈 교수가 남긴 유서에는 아름다운 조국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무력함 그리고 갈 길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는 필리핀 앞날에 좌절하면서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다.

작가는 이러한 암울한 필리핀 현실과 미래를 묘사하면서 변화가 필요하지만 그 변화에 동참하지 않고 좌절하는 사람들에 대해 묘사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언급되는 매춘은 필리핀인 부패와 타락에 대한 은유라고 언급한 바 있다. 작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작품을 통해 상류층 부정과 부패만이 아니라 부조리한 필리핀 사회 전체를 그려냈다. 호세 작가 28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소개됐지만 정작 필리핀에서는 저평가 된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작가들은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배경으로 도시 발전과 동시에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몰락에 대해서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라떼 성당

소설  <에르미따>는 1988년 작품으로 국내에는 지난 2007년에 소개됐다. 소설 배경이자 한때 유흥가가 밀집한 지역은 에르미따 성당에서 말라떼 성당까지 거리 일대이다. 에르미따 성당은 1571년에 만들어진 건물로 당시에는 목조건물이었으나 1918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개축됐다. 하지만 1945년에 전쟁으로 성당이 완전히 파괴됐으며, 이후 재건축에 들어가 1953년에 완공됐다. 말라떼에도 1588년에 세워진 오래된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1680년에 석조 건물로 재건축을 거치고, 태평양 전쟁 중에는 건물 벽을 제외하고 모든 구조물이 불에 타는 등 수난도 당했지만 1950년대 재건축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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