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2. 08:26ㆍ필리핀/뉴스와 통계
문화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어느 한 곳에 고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 스며들며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낸다. 지난 20년 이상 필리핀 대중문화 시장은 한국 대중음악과 드라마라는 거대한 조류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우리는 어쩌면 이 흐름과는 조금 다른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약 20년 전에 한국인 산다라박이 필리핀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국민적 스타가 됐다. 이후에 한국에서 2NE1으로 화려하게 재데뷔하여, 양국 모두에서 사랑받고 있다. 산다라박이 양국 모두에서 ‘스타’가 됐다면, 이제는 필리핀 그윈 도라도(Gwyn Dorado)가 한국에서 한국어로 노래하며 새로운 ‘스타’가 되고자 하고 있다.
그윈 도라도 성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2004년 필리핀 풍경을 되짚어 보아야 한다. 당시 필리핀 ABS-CBN 주최 서바이벌 오디션 <스타 서클 퀘스트(Star Circle Quest)>에 낯선 한국인 소녀가 등장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산다라박이다. 그녀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심 어린 필리핀어로 대중들 마음을 두드렸다. 서툰 언어는 오히려 귀여움이 됐고, 그녀가 눈물 흘릴 때 필리핀 국민들도 함께 울었다. 산다라박은 최종 2위를 차지하면서 필리핀 ‘국민 여동생’이 되었고, 데뷔 앨범은 필리핀 음악 차트 1위를 기록하며 100만장에 근접한 판매고를 달성했다.
산다라박 사례는 한국 콘텐츠가 필리핀에 진출하기 전, 사람이 먼저 국경을 넘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2NE1으로 활동하며 필리핀과 한국을 잇는 가장 강력한 문화 가교 역할을 했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한국은 ‘산다라의 나라’였고, 한국 사람들에게 필리핀은 ‘산다라를 키워준 고마운 나라’가 되었다. 산다라박이 필리핀에서 사랑받은 한국인이었다면, 2026년 그윈 도라도는 한국에서 사랑받기 시작한 필리핀인이다. 본명이 그위넷 제어리 도라도(Gwyneth J-earei S. Dorado)인 도라도는 2015년 ‘아시아 갓 탤런트(Asia’s Got Talent)’에 참가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아시아 갓 탤런트’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도라도는 필리핀에서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에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과거 ‘아시아 갓 탤런트’ 결승 진출로 실력을 증명했던 그녀는 JTBC 서바이벌 프로그램 <싱어게인 4>에 등장해 단순한 외국인 참가자가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한국인보다 더 깊은 감성으로 옛 한국 노래를 소화하며 조회수 수백만 회를 기록했고, 심사위원들로부터 ‘지금 당장 데뷔할 수 있는 완성형 가수’라는 극찬도 받았다. <그때 헤어지면 돼>를 비롯하여 도라도가 부른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 심금을 울렸으며, 한국인들은 국적이 아닌 ‘목소리’와 ‘해석력’에 투표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진심을 다해 자신을 던진 도라도는 최종 준우승이라는 값진 결과를 거머쥐었다.
그녀가 거둔 성공은 대형 기획사 자본과 함께 한 결과가 아니다. 그 시작은 전 세계가 멈춰 섰던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 나라에서 그러했듯이 팬데믹 기간 필리핀 공연 예술계도 완전히 마비됐다. 도라도 역시 설 수 있는 무대가 사라진 절망적인 상황에 힘들었다. 그녀는 좌절하는 대신 인공조명이 아닌 자연광 아래에서, 화려한 무대 의상 대신 편안한 옷차림으로 노래 부른 영상들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녀는 당시 자신이 느꼈던 고립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담아 곡을 썼고,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Why Do We Love>였다.
<Why Do We Love>가 알고리즘을 타면서 노래는 한국에 전해졌고, 이는 도라도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연예 기획사 AO 엔터테인먼트는 그녀에게 즉각 연락을 넣었다. 2024년 2월 AO 엔터테인먼트와 5년 전속 계약을 맺은 도라도는 올해 초 화려하게 한국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라도는 팬데믹 기간 중 한국 드라마 팬이 되었으며, 그때 처음으로 배운 한국어 노래가 바로 <힘쎈여자 도봉순> OST에 있는 <그대란 정원>이었다. 도라도는 이 곡을 연습하며 섬세한 떨림과 한(恨)과 정(情)이 섞인 정서를 몸소 익혔다. 이렇듯 성공을 위해 도라도는 한국 드라마 OST를 통해 한국적인 감성을 독학했다. 산다라박이 필리핀 정서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했듯, 도라도 역시 한국적인 깊은 감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교정하는 혹독한 과정을 거쳤다.

노력 이외에도 성공 뒤에는 낯선 타국에서 겪는 외로움이 있었다. 부모님 품을 떠나 홀로 한국 땅을 밟은 도라도에 가장 큰 적은 ‘추위’와 ‘향수병’이었다. 부모님과 따뜻한 필리핀 날씨가 그리워질 때마다 그녀를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한편 도라도가 한국 팬들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음악’만이 아니다. 2026년 1월 23일, 도라도는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 경기지회에 300만 원을 기탁했다. 도라도는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준 한국 사회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어서 기부에 나섰다고 밝혔다. 산다라박이 필리핀에 태풍이 올 때마다 앞장서서 도왔던 것처럼, 도라도 역시 자신이 활동 중인 땅의 아픔을 돌볼 줄 아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윈 도라도의 여정은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2026년 2월 7일 부산 공연을 시작으로 서울, 인천, 대구, 울산 등 주요 도시를 도는 <싱어게인 4> TOP10 전국 투어에 참여 중에 있다. 또한 이번 여름, 넷플릭스(Netflix) 오리지널 쇼 출연을 앞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 무대로 도약하고자 한다. 하지만 도라도는 자신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됐던 한국 드라마 OST를 직접 부르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고 있다. 산다라박이 한국과 필리핀을 오고 가면서 양국 우호에 기여했듯이, 도라도 역시 한국 콘텐츠에 참여하면서 필리핀과 한국을 이어가는 데에 기여하고자 한다.
산다라박과 그윈 도라도. 국적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한-필 양국 거리를 좁히는 핵심적인 문화적 가교다. 산다라박이 교류 물꼬를 튼 선구자였다면, 그윈 도라도는 그 물길을 따라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존재다. 산다라박이 양국을 잇는 ‘문’을 열어젖혔다면, 도라도는 그 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마음과 마음을 잇는 문화 전령사로서, 이제 양국은 서로의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그녀 노래가 한국 드라마에 들려오는 날, 한국과 필리핀 교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 《ABS-CBN》 (2026. 1. 7). Filipina singer Gwyn Dorado wins second place in South Korea’s ‘Sing Again 4’, https://www.abs-cbn.com/entertainment/showbiz/movies-series/2026/1/7/filipina-singer-gwyn-dorado-wins-second-place-in-south-korea-s-sing-again-4-2311
- 《Manila Bulletin》 (2026. 1. 9). Gwyn Dorado says she is happy to reach finals of 'Sing Again 4', https://mb.com.ph/2026/01/09/gwyn-dorado-says-she-is-happy-to-reach-finals-of-sing-again-4
- 《Philstar》 (2026. 2. 7). When the tide turns: How Gwyn Dorado is making waves in South Korea, https://www.philstar.com/entertainment/2026/02/07/2506251/when-tide-turns-how-gwyn-dorado-making-waves-south-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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