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진화에도 불구하고 노동 밀도가 높아지는 이유: 생산성 역설과 제번스의 역설

2026. 2. 12. 18:44필리핀/뉴스와 통계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에 있는 공유 사무실.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노트북 앞을 지키는 20대 청년 눈은 충혈되어 있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서구 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갖춘 청년은 미국 시간에 맞춰 밤낮을 바꾸고 있다. 낮에는 필리핀 기업 마케터로 일하고, 밤에는 미국 고객을 위한 가상 비서(VA)로 변신하며, 틈틈이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을 이용해 콘텐츠를 생성해 납품한다. 이른바 ‘라케티어(Raketeer)’인 그는 수입은 늘었지만, 영혼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라는 고백처럼 자신이 누군지를 잊어가고 있다. 

최근 필리핀 사회는 부업 문화를 뜻하는 ‘라켓(Raket)’과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디지털 시대’가 충돌하는 사회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라켓’은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넘어선 생존 전략이자 삶의 양식이다. 전통적으로 아는 사람을 중심으로 소개를 받던 일거리였던 ‘라켓’ 시장은 디지털 플랫폼과 결합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이를 통해 일하는 사람들 역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한 새로운 기회가 도래했으나, 그 이면에는 심신이 모두 피폐해지는 심각한 번아웃(Burnout)과 정체성 혼란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인공지능 도입으로 개인 작업 효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했으나, 정작 국가 전체적인 부가가치나 노동자 삶의 질 지표는 정체되어 있는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이다. 도구는 진화했음에도 우리는 쉴 수가 없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제번스의 역설(Jevons Paradox)이다. 기술 발전으로 업무당 투입 시간이 줄어들자, 노동자들은 휴식 대신 더 많은 업무를 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인공지능 덕분에 5시간 걸릴 일을 1시간 만에 끝내게 되자, 남은 4시간 동안 또 다른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노동 밀도는 무한히 증가하는 ‘효율성’이라는 감옥에 갇힌 셈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필리핀 젊은 층 사이에서는 영국의 기업가 스티븐 바틀릿(Steven Bartlett) 팟캐스트 ‘The Diary of a CEO’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사이먼 사이넥(Simon Sinek),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 등이 출연해 던지는 화두는
명확하다. 지속 가능한 성과는 고통이 아닌 평온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이먼 사이넥은 본질적인 ‘목적의식(Why)’를 잃은 노동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리처드 브랜슨은 휴식이 창의적 의사결정에 핵심적인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필리핀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이제 번아웃(Burnout)을 ‘훈장’이 아닌, ‘질병’으로 인식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사태 심각성을 인지한 필리핀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보통신기술부(DICT)와 기술교육개발청(TESDA), 그리고 IT-BPM 협회는 협력하여 ‘Project UNLAD’를 출범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급변하는 환경에서 무너지지 않는 ‘적응력(Resilience)’과 ‘디지털 문해력(Digital Literacy)’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는 기술을 도구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에 매몰될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필리핀 라켓 문화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정신 건강 전문의들은 생산성은 단순히 양적인 지표가 아니다라며 “인공지능 시대 진정한 경쟁력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심층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업무(Deep Work)’와 공감적 소통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사태 심각성을 인지한 필리핀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보통신기술부(DICT)와 기술교육개발청(TESDA), 그리고 IT-BPM 협회는 협력하여 ‘Project UNLAD’를 출범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들이 급변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적응력(Resilience)’을 교육하는 데 방점이 있다. 다시 말해 기술을 도구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에 매몰될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다.

전문가들은 필리핀 라켓 문화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정신 건강 전문의들은
생산성은 단순히 양적인 지표가 아니다라며 “인공지능 시대 진정한 경쟁력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심층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업무(Deep Work)’와 공감적 소통에서 나온다”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적인 지적도 존재한다. 초단기 노동자(Gig Worker)와 같은 이들에게 한 가지 업무에만 깊이 파고들거나 몰입하는 일은 당장 수입 감소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내일을 계획하기보다 생존이 급선무이기에, 목전에 있는 수입을 포기하는 일은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사회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개인 의지만이 아니라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단순 반복 업무(Shallow Work)가 아닌 고부가가치 업무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시장 구조 변화가 병행되어야 하며, 정부는 이를 위한 제도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필리핀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디지털 도구가 주는 풍요를 누리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정신적 자산을 지켜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도구가 삶을 압도하도록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도구를 다스려 더 깊은 사유의 시대를 열 것인가라는 숙제를 우리가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인공지능은 우리를 해방할 수도, 혹은 새로운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참고자료
https://business.inquirer.net/573052/filipinos-face-burnout-amid-raket-culture-hyper%E2%80%91digital-era-of-ai?utm_source=(direct)&utm_medium=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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