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정체성, 그리고 민주주의 위기: 인지 기제에 관한 분석

2025. 11. 25. 09:14한국/잡동사니

I. 문제 제시: 정치적 편견이라는 숨겨진 얼굴 

2019년 미국 시장조사 기업 시빅 사이언스(Civic Science)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56%인 2,020명이 미국 학교에서 ‘아라비아 숫자(Arabian Numerals)’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아라비아 숫자’는 0부터 9까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숫자 체계다. 그렇다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숫자를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들은 어떠 맥락에서 그런 답을 한 것일까? 

시빅 사이언스가 3,624명에게 던진 질문은 “미국 학교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가르쳐야 할까요?(Should schools in America teach Arabic numerals as part of their curriculum?)”라는 간단한 것이었다. 질문자들은 ‘아라비아 숫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하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아라비아 숫자’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시빅 사이언스 존 딕 CEO에 따르면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는 연구 목표가 “질문을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갖고 있는 잠재된 편견을 드러내는 것(tease out prejudice among those who didn’t understand the question)”이라고 밝혔다. 즉, 응답자들이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선입견과 정치적 신념에 근거하여 반응하는지를 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조사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놀라웠다. 총 3,624명 중 2,020명(56%)이 ‘아라비아 숫자’ 교육에 반대했으며, 찬성은 29%에 불과했다. 지지 정당별로 보면 공화당 지지자 가운데 72%가 반대했으며, 민주당 지지자 반대 비율은 40%였다. 두 집단 사이 교육 수준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기에 이러한 차이는 교육보다는 정치 성향과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존 딕 CEO는 결과에 대해 “미국에서 확인된 편견에 대한 가장 웃기면서도 슬픈 증거”라고 표현하며, “이는 단순히 지식이나 무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편견이라는 다른 무언가에 관한 것임을 의미한다”라고 덧붙였다.

II. 아라비아 숫자: 편견 대상이 된 과학적 유산

조사에 응한 많은 미국인들은 ‘아라비아 숫자’, 즉 ‘아랍(Arabian)’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아라비아 숫자’는 기원전 3세기경 인도 수학자들이 개발한 것이다. 이 숫자 체계는 6~7세기경에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으며, 인도 수학자들은 영(0) 개념을 도입하여 현대 수학 기초를 마련했다. 

이후 숫자 체계는 8~9세기 경에 아랍 지역으로 전파됐으며, 아랍 학자들과 상인들이 이를 널리 전파했다. 아랍 세계에 전파된 이 숫자 체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대표적으로 공헌한 학자는 알-콰리즈미(Muhammad ibn Musa al-Khwarizmi)와 알 킨디(al-Kindi)다. 특히 알-콰리즈미 저작은 ‘아라비아 숫자’를 널리 보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알고리즘(Algorithm)’이라는 단어 탄생에도 기여했다. 알-콰리즈미 이름을 라틴어로 표기한 ‘알고리스무스(Algorismus)’는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한 계산법을 뜻하게 됐고, 이 용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알고리즘’이라는 단어로 변화한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12세기경에 유럽으로 전파됐다. 중동 수학자들이 쓴 아랍어 저술을 유럽 학자들이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이 숫자 체계가 소개되었다. 특히 1202년 레오나르도 피사노(피보나치)가 쓴 『산반서(Liber Abaci)』를 통해 ‘아라비아 숫자’가 소개되며, 이를 사용하는 유럽국가들이 점차 증가했다. 이후 15세기에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아라비아 숫자’는 유럽에서 점차 로마 숫자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서양에서는 이러한 숫자 체계를 ‘아라비아 숫자’로 부르게 됐지만, 이름과 달리 이는 인도에서 유래하여 중동을 거쳐 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보다 정확한 명칭은 ‘힌두-아랍 숫자(Hindu-Arabic numerals)’이며, 이는 인도와 아랍 두 문명이 이 숫자 체계 탄생과 전파에 기여했음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가 담긴 이름 자체가, 과학적 업적보다 정치적·문화적 편견에 우선하게 되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III. 또 다른 편견: 르메르트와 창조이론 설문

시빅 사이언스는 편견이 한쪽 정치 진영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설문에 두 번째 질문을 넣었다. 두 번째 질문은 바로 “미국 학교에서 가톨릭 사제 조르주 르메트르가 주장한 창조 이론을 과학 교육과정 일부로 가르쳐야 할까요?(Should schools in America teach the creation theory of Catholic priest George Lemaitre as part of their science curriculum?)”였다.

이에 대한 응답 결과는 첫 번째 질문인 ‘아라비아 숫자’에 대한 질문과는 정반대였다. 미국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73%가 반대했으며, 공화당 지지자 반대 비율은 33%에 불과했다. 많은 응답자들이 ‘가톨릭 사제’와 ‘창조 이론(Creation Theory)’이라는 단어들로부터 특정한 이미지를 연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설문 결과를 비교하면, 정치 진영에 관계없이 자신의 신념과 부합하지 않아 보이는 주제에 대해서는 정보 확인 없이 거부하는 양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IV. 조르주 르메르트: 과학자이자 가톨릭 사제

두 번째 질문에 등장하는 조르주 르메트르는 벨기에 가톨릭 사제이자 물리학자였다. 그는 1927년에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풀어 우주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팽창하고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르메트르는 은하들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관측, 즉 적색 편이 현상을 우주 팽창 증거로 해석했으며, 이는 에드윈 파월 허블이 ‘허블 법칙(Hubble's law)’을 발표하기 2년 전에 이룬 업적이다. 2018년 10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천문연맹총회에서 르메트르 업적을 공식 인정하여, 기존 ‘허블 법칙’ 명칭을 ‘허블-르메트르 법칙(Hubble–Lemaître law)’으로 변경했다. 

1931년 르메트르는 “우주가 현재 팽창하고 있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물질이 한 점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초기 상태를 ‘원시 원자(Primeval Atom)’라고 명명했다. 같은 해 그는 영국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양자론의 관점에서 본 우주의 시작(The Beginning of the World from the Point of View of Quantum Theory)”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게재했다. 르메트르는 ‘원시 원자’ 이 원시 원자가 불안정하여 분열함으로써 현재 우주가 형성됐으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 새롭게 등장한 ‘양자론(Quantum Theory)’을 도입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오늘날 ‘빅뱅 이론(Big Bang Theory)’을 형성하는 기초가 됐다. 


V. 빅뱅 이론 탄생과 이에 저항한 과학계

‘빅뱅(Big Bang)’이라는 단어는 1949년 3월 28일 BBC 라디오 방송국 제3 프로그램(Third Programme)에 출연한 영국 이론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프레드 호일(Sir Fred Hoyle)이 르메르트가 주장한 원시 원자 가설인 팽창 우주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용했다. 프레드 호일은 라디오 방송에서 “이 이론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들이 먼 과거 특정 시점에 창조되었다는 가설에 기반합니다. 저는 이것을 ‘빅뱅’ 아이디어라고 부릅니다.(These theories were based on the hypothesis that the whole matter of the universe was created in one single event at a particular time in the remote past. It’s what I call the ‘Big Bang’ idea.)라고 말했다. 호일은 훗날 조롱할 의도 없이 그저 팽창 우주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2001년에 사망할 때까지도 ‘빅뱅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신 정상우주론(Steady State Theory)을 주장했다.   

조르주 르메트르가 ‘빅뱅 이론’을 처음 주창했을 때, 해당 이론이 마치 성서에 등장하는 천지창조를 연상시켜 과학계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르메르트가 가톨릭 사제였다는 점은 과학계 저항을 가중시켰고, 반면 종교계는 이 이론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르메트르는 교황 비오 12세를 포함한 주요 인사들에게 자신이 제시한 이론은 순수한 가설일 뿐이며 종교적 창조와는 별개임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과학과 신앙을 분명히 구분했으며, 스스로도 물리학자로서 활동 시에는 성직자임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실 허블과 르메트르가 이 법칙을 발표하기 이전에, 소련 수학자였던 알렉산드르 프리드만(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ри́дман, 1888-1925) 역시 비슷한 주장을 내놓았다. 프리드만은 1922년 “우주의 곡률에 관하여(Über die Krümmung des Raumes)”라는 논문을 통해 ‘빅뱅 이론’을 이론적으로 예견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르메트르는 5년 뒤인 1927년에 프리드만과는 독립적으로 관측값을 통해 같은 결과에 도달한 것이다. 

VI. 인지 심리학으로 보는 편견 작동 방식

이제 앞서 제시한 두 설문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시빅 사이언스 존 딕 CEO는 ‘아라비아 숫자’와 ‘가톨릭 사제 르메르트’에 대한 응답 결과에 대해 “르메트르가 아라비아 숫자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결과적인 효과는 거의 동일합니다. 민주당원들은 서구 종교에 대해 잠재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맹목적인 편견은 양쪽 모두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While Lemaitre is more obscure than Arabic numerals, the resulting effect is almost identical,” Mr Dick said. “Dems are biased against Western religion, if latently. “This kind of blind prejudice can happen on both sides.)”라고 말했다.

확증편향과 동기화된 추론
편견과 관련된 심리적 근거는 먼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으로 설명할 수 있다. 확증편향은 사람들이 기존 신념을 확인해 주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찾아 해석하고 기억하는 경향이다. 예를 들어, 응답자들은 ‘아라비아 숫자’나 ‘가톨릭 사제’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실제 의미를 확인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선입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즉각 해석했다.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개념이 동기화된 추론(Motivated Reasoning)이다. 캐나다 워털루대 지바 쿤다(Ziva Kunda) 교수가 1990년에 발표한 논문 “동기화된 추론에 대한 사례(The Case for Motivated Reasoning)”에 따르면, 정확성 동기보다 특정 결론에 도달하려는 방향성 동기가 더 강할 때 사람들은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전략과 신념을 선택적으로 활용한다. 이는 의식적 과정이 아니라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며, 개인은 자신이 편향된 추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변호사가 의뢰인을 변호하듯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이나 욕구를 지지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차용하여 원하는 결론을 정당화한다.                  

쿤다 교수 후속 연구에 따르면 고정관념이 항상 활성화되거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며, 동기와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작용하고 변화한다. 이는 고정관념이 항상 고정적인 것이 아니며, 유불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작동하고 변화한다는 뜻이다.

이중 과정 이론: 직관 vs. 분석
프린스턴 대학교 다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교수는 이중 과정 이론(Dual Process Theory)을 통해 우리가 사고하는 과정은 빠르고 자동적인 직관적 판단 체계인 ‘시스템 1’과 느리고 의도적인 분석적 판단 체계인 ‘시스템 2’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앞서 설문조사에 응답한 사람들은 ‘시스템 2’를 활성화하여 '아라비아 숫자'가 실제로 무엇인지 생각하는 대신, ‘시스템 1’을 통해 ‘아랍’이라는 단어에 근거해 즉각적인 판단을 내렸다. 자동적이고 직관적인 ‘시스템 1’은 일상적 의사결정에서는 효율적이지만, 복잡한 문제나 낯선 정보를 다룰 때는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VII. 가상 도시 폭격과 정치적 편견

이러한 작동방식을 더욱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2015년 12월 18일에 공개된 여론 조사 질문은 “아그라바 폭격에 찬성하시나요 아니면 반대하시나요?(Do you support or oppose bombing Agrabah?)”였다. 해당 질문에 공화당 지지자 30%가 찬성했으며, 반대는 13%였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지지층에서는 ‘아그라바(Agrabah)’ 폭격 찬성 비율이 41%로 일반 공화당 지지자들보다 더 높았다.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폭격 찬성은 19%, 반대 36%였다.

그런데 ‘아그라바(Agrabah)’는 1992년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알라딘 (Aladdin)》 배경인 가상 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응답자들은 해당 도시에 대해 별도 확인 없이 응답했다. 폭격에 찬성한 이들은 ‘아그라바’가 중동에 있는 도시 이름처럼 들린다는 점 때문에 질문 내용을 자세히 확인하지 않고 반이슬람 정서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찬성’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여러 언론은 이 충격적인 결과를 인용하며, 유권자들이 중요한 외교 정책에 대해 충분한 정보나 맥락 없이 편견에 기반해 판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사례는 정치적 편견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응답자들은 실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그라바’라는 이름을 듣고 '시스템 1'에 의존하여 가상 도시 폭격을 지지하거나 반대했다. 이는 특정 단어나 이미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사실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음을 의미한다.             


VIII. 사회정체성과 집단 정체성 역할

헨리 타즈펠(Henri Tajfel)과 존 터너(John Turner)는 사회정체성 이론(Social Identity Theory)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을 통해 자아개념을 형성하며, 내집단(in-group)을 선호하고 외집단(out-group)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적 정체성은 특히나 강력한 집단 정체성이 되며,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집단에 더욱 강하게 동조하고 상대 집단을 적대시하는 방향으로 태도와 신념을 형성한다. 연구에 따르면 정치적 정체성이 강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약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욱 뚜렷한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 현상을 보인다.

시빅 사이언스 설문에서 양당 지지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아랍’, ‘가톨릭 사제’)에 반사적으로 부정적 반응을 보인 현상은, 이론적으로는 내집단에 대한 편향과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정치적 정체성이 얼마나 무의식적 차원에서 인식과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IX. 정서적 양극화: 교차 정체성 상실

현대 사회에서 정치적 편견 문제가 심화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 심화와 교차 정체성(Cross-cutting Identities) 상실에 있다. 정서적 양극화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호감은 강하게 느끼는 반면, 자신과 반대되는 집단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존스 홉킨스 대학교 릴리아나 메이슨(Lilliana Mason) 교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정당이 제시하는 실제 정책 차이보다 훨씬 더 강한 ‘정당기반편향(Partisan Bias)’을 드러내고, 불관용적이며, 분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정책에 기반하여 정당을 선택하기보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정책 의견을 바꾸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책 내용과 논리적 일관성보다 집단 소속감이라는 정체성에 근거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뜻이다. 

메이슨에 따르면 정서적 양극화 근본 원인은 ‘교차 정체성’ 감소에 있다. 과거에는 종교, 사회계층, 지역 등 다양한 정체성이 정치적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연결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화당 지지자였다 하더라도, 동시에 같은 교회 신도들(민주당 지지자 포함)과 신앙 공동체를 이루거나, 같은 노동조합에 소속된 노동자들과 경제적 이익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차 정체성’은 사람들이 다른 상대와 공통된 기반을 공유하고 일상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성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교차 정체성이 급속히 감소하면서, 정치적 정체성이 종교, 계층, 지역 등 다른 모든 정체성을 압도하는 ‘지배적 정체성(Dominant Identity)’으로 자리 잡았다. 결과적으로 이제 상대 정당 지지자들은 정책 의견이 다른 시민이 아니라 내 가치관을 위협하는
적(Enemy)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메이슨 연구가 보여주는 더욱 위협적인 발견은, 사회적 양극화 증가가 신념의 극단화(인지적 양극화)보다 2~3배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신념 차이 자체보다 실제 인간관계 단절이 민주주의에 더 큰 위협임을 의미한다. 신념은 증거와 대화로 변할 수 있지만, 관계가 끊어지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X. 파편화 된 미디어 환경과 알고리즘 역할

‘교차 정체성’ 와해 주요 원인은 현대 미디어 환경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은 사용자 선호도에 기반한 콘텐츠를 우선적으로 노출시키는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에 대한 노출은 줄어드는 반면, 이미 가진 편향적 신념이 지속적으로 강화된다.                                    

선택적 노출 이론(Selective Exposure Theory)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태도와 일치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찾고, 모순되는 정보는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 환경의 파편화와 양극화는 이러한 선택적 노출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연구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파편화된 미디어 환경에 노출되는 사람들에게서 선택적 노출 행동을 더욱 빈번하고 강력하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선택적 노출이 더욱 많이 관찰된다.  이런 방식으로 편향된 매체만 접하게 되면 자신이 이미 믿는 것만 계속 보게 되고,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던 일상적 상호작용이라는 사회적 완충장치가 와해된다. 이러한 구조 변화로 인해 정서적 양극화가 극단적으로 심화되었으며, 대화와 타협을 가능했던 사회 연결 고리가 단절되고, 정치적 신념이 의사결정 기준이 되는
 동질성 정치(Politics of Homogeneity) 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XI. 정체성 보호 인지: 사실보다 신념이 먼저일 때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인지 부조화 이론(Cognitive Dissonance Theory)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 모순되는 인지나 신념을 동시에 가질 때 심리적 불편함을 경험하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인지나 행동을 변화시킨다고 설명했다. 예일대 법대 교수인 댄 카한(Dan Kahan)과 동료들이 제시한 정체성 보호 인지(Identity-Protective Cognition)인지 부조화 이론을 집단 정체성 맥락으로 재해석한 것이다정체성 보호 인지는 개인 정체성이나 집단 소속감과 충돌하는 사실이나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거나 선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기존 정체성을 보전하려는 인지적 기제를 말한다. 

응답자들이 아라비아 숫자’와 ‘가톨릭 사제 르메르트’ 같은 단어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정보 진위를 확인하기 전에 정체성 보호 인지가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정체성과 충돌하는 정보를 마주했을 때, 합리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없이 즉각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정체성을 보호한다. 이는 사실 여부 검증보다 정체성 방어가 우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XII. 현대 민주주의 위기와 해결 방향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결국 현대 민주주의가 처한 근본적인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합리적인 판단과 사실에 기반하여 의견을 교환한다는 전제하에 작동하지만, 시민들이 자신이 모르는 주제에 의문을 표하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고, 정치적 신념에 따라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며, 또 사실 확인 노력이나 다른 의견 경청 없이 즉각적으로 행동한다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은 작동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맹목적인 편견은 특정 진영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학교교육 수준과 비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앞선 설문들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양당 지지자들 교육 수준이 비슷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정체성과 신념이 결합된 심리적 기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특정 국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며, 우리들 주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한국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을 정당화하기 위한 맹목적인 시도들을 매일 같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해결책: 구조적 개입과 문화 변화를 위한 공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매체 문해력(Media literacy) 교육 강화가 필수적이다. 학교교육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부터 정보 출처 검증, 비판적 사고, 그리고 인지 편향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켜야 한다. 둘째, 플랫폼 기업에게도 책임 강화를 위한 노력을 요구해야 한다. 알고리즘 투명성 공개와 다양한 관점에서 만들어진 콘텐츠 노출을 의무화함으로써 선택적 노출이 불러오는 악순환을 완화할 수 있다. 셋째, 사회적 ‘교차 정체성 재구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 공동체, 직업 공동체 등 다양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여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현대 민주주의 재생은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며, 정치적 정체성보다 사실을 우선시하는 문화적 전환에 달려 있다. 이는 개인적 노력과 사회 구조적 개입이 함께 이루어져야 이룰 수 있는 과제이며, 이를 위해서는 학습과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이 어떤 인지 편향 속에 있는지, 어떤 정체성이 자신의 판단을 지배하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앞서 살펴본 시빅 사이언스 설문에서 응답자들이 저지른 오류는 단순히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으며, 정치적 신념에 기반한 자동적 판단을 합리적 판단이라고 착각했다. 따라서 현대 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학력이나 정보량 증가보다는, 스스로 인지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정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메타인지(Metacognition) 능력이다. 이는 교실 내 교과과정 학습만으로는 불충분할 수 있으며,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이 아는 바를 점검하고, 이에 대한 의문을 표하면서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개발될 수 있다. 결국 나를 지키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학습은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실천해야 할 교육일 것이다. 


참고자료
- https://www.independent.co.uk/news/world/americas/americans-support-bombing-the-fictional-city-in-aladdin-a6779246.html
- https://www.nytimes.com/2019/06/04/opinion/arabic-numerals.html
- https://www.independent.co.uk/news/arabic-numerals-survey-prejudice-bias-survey-research-civic-science-a89182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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