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23. 15:26ㆍ한국/잡동사니
12년 만에 다시 펼친 이 책은 페다고지 역사를 조망하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학교교육을 잠식해버린 서글픈 현실을 직시한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경제적 효율성과 시장 가치라는 틀에 매몰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학생들은 주체적인 학습자가 아닌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퇴임한 조시화 교수 저서 『비판적 페다고지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명확하다. 과연 학교는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그 질서에 균열을 내는 해방의 도구인가?
‘페다고지(Pedagogy)’는 고대 그리스어인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ός)에서 유래된 단어로, ‘어린이’이라는 뜻인 ‘파이스(παῖς)’와 ‘이끌다, 안내하다’라는 뜻인 ‘아고(ἄγω)’가 합쳐진 것이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어린이를 이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페다고지’를 아동·청소년 대상으로 하는 교사 중심·타율적 교수법인 반면, 안드라고지(Andragogy)는 성인 학습자 중심·자기주도적 경험 기반 학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페다고지’는 단순히 강의하는 행위 이상을 포함하며, 학습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인 교수 기법을 비롯하여, 교육 철학, 학습 환경, 평가 등을 포괄하고 있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판적 페다고지(Critical Pedagogy)’는 학교교육을 사회 변화와 해방을 위한 도구로 보는 교수 철학이자 사회 운동이다. ‘비판적 페다고지’는 가르치는 지식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학교교육은 기존 체제를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비판적 페다고지’ 핵심 목표는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억압을 인식하고 질문하며, 그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인 ‘비판적 의식’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브라질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1968년 출간한 『페다고지: 억눌린자를 위한 교육(Pedagogy of the Oppressed)』를 통해 ‘비판적 페다고지’에 대해 설명했다. 프레이리는 교사가 학생 머릿속에 지식을 일방적으로 입금하는 은행 저금식 교육(Banking Concept of Education, Banking Model)을 거부하고, 현실에 가득한 모순을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문제 제기/해결식 교육(Problem-Posing/Solving Education)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처한 억압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당연한 운명이 아닌 변화 가능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과정인 ‘의식화(Conscientization)’와 성찰(Reflection)과 행동(Action)이 결합되는 ‘프락시스(Praxis)’를 강조했다. 성찰 없는 행동은 맹목적이고, 행동 없는 성찰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와 같은 탁상공론에 불가하기에, ‘비판적 페다고지’는 지식이 세상을 개선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무의미하다고 강조한다.

『비판적 페다고지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는 1970년대 이론이 가졌던 한계, 즉 “비판만 하고 대안이 없다”는 지적을 수용하며 1980년대 말부터 실질적인 교육 대안을 모색해온 과정을 추적한다. 또한 기존 이론이 남성 및 계급 중심이었다는 점을 반성하며 젠더와 인종 문제를 포섭하는 확장을 보여준다. 조시화 교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사회를 상상하며, 학교가 변화를 이끄는 능동적 ‘행위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파올루 프레이리 활동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페다고지: 억눌린자를 위한 교육(Pedagogy of the Oppressed)』가 1970년대 전 세계 학생 및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비판적 페다고지’가 학교교육과 자본주의 관계를 조명하고, 획일적인 공교육을 비판하면서 교육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비판적 페다고지’가 이론적이어서 일반 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철학적 본질보다는 단순한 ‘교수법(Teaching Method)’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조시화 교수는 사회민주주의, 글로벌 사회주의, 경제적 자급자족 모델 등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적 사회를 제시하며, 학교가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행위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비판적 페다고지’가 지향하는 ‘프락시스’는 단순히 사회적 모순을 깨닫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변화를 꿈꾸는 주체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진실성’이라는 문제로 확장할 수 있다. 세상을 바꾸려는 비판적 인식이 공허한 독백이나 선동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학습자는 먼저 스스로에 대해 마주하고 내면을 성실하게 일궈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참된 앎’과 ‘성실함’이라는 가치는 ‘비판적 페다고지’가 추구하는 인간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여정 속에서 우리는 ‘무능력(無能力)’과 ‘불성실(不誠實)’이라는 단어와 조우하게 된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그나마 나은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개인 역량 문제를 넘어 인간 도리와 존재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격적 가치와 삶을 대하는 태도 측면에서 ‘무능력’은 차라리 안타까운 한계일 수 있으나, ‘불성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만이자 타인에 대한 해악이다. 이와 관련하여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에게 “지지위지지 부지위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말했다. 이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된 앎이다”라는 뜻이다.

참된 ‘앎’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정직함’과 ‘(무지를) 인정’이라는 것이다. ‘무능력’은 배움과 시간을 통해 채울 수 있는 빈 그릇과 같다.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묵묵히 길을 걷는 무능한 자는 적어도 스스로와 주변에 정직하다. 반면, ‘불성실’은 깨진 그릇과 같다. 설령 재능이 있다고 해도 밑 빠진 독처럼 재능이 새어 나간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지런함(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보배다”라고 강조하며, 성실함이 없는 재능은 등불 없는 밤길과 같다고 경계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를 통해 사회적 계약과 신뢰 문제를 언급했다. 그가 언급한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처럼 “개인적인 행동 원칙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어도 문제가 없는지 검토”해야 한다면 불성실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무능은 교육으로 보완할 수 있지만, 불성실은 신뢰를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 무능한 사람은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지만, 불성실한 사람은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관계라는 끈을 스스로 끊어버리게 된다. 결국 무능력은 성장이라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불성실은 망하는 시작점과 같은 것이다.
오래 살면서 후회하는 지점 중 하나는 ‘왜 더 유능하지 않았을까’보다는 ‘왜 더 진심을 다하지 못했는가’에 가깝다. 능력은 타고난 재능이나 환경에 좌우되기도 하지만, 성실은 개인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능력은 타인 배려와 스스로 노력 속에서 채울 수 있지만, 썩어버린 마음가짐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결국 비판적 페다고지가 지향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자신의 삶에 진심을 다하는 성실한 태도라는 가장 단단한 뿌리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참고자료
- 파울로 프레이리 (2002). 페다고지: 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 (남경태 역). 그린비.
- Kant, I. (2002).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역). 아카넷.
- 정약용 (2009).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박석무 편역). 창비.
- 조시화 (2014). 비판적 페다고지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살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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